등산...여행...

서울 나들이

철우박 2008. 2. 25. 13:58

 

아주 오래간만에 인사동엘 갔습니다.

민미협 정기총회를 치르러 갔습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치른다고... 다음날 서울구경을 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서울을 싫어했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무렵, 모든 식구가 저만 남겨두고 상경한 지, 어언 30년이 흘렀습니다.

전라도 시골학교에 근무하면서 깡다구로 고향을 지키겠다는 저를, 우리 가족 어느 누구도

설득시키지는 못했었습니다.

제가 다달이 보낸 돈으로 고덕동에 주공아파트도 분양받았지만 저는 서울로 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군에서 휴가를 나와서도 서울집에서 이삼일을 버티지 못하고 광주로 친구들을 만나러 내려 온 것은

아마도... 제 자신이 변화를 두려워 하는 겁쟁이였거나, 혹은 한번만 마음 주면 변치 않는 순정파였을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저는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이산가족이 되어 이곳 광주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도 어렸을 때는 누구나 처럼 서울을 무척 동경하고 좋아했었습니다.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미술대회는 수학여행을 포기하면서까지 빠짐 없이 참가했었습니다.

 

오늘은 그 옛날 고교생같은 심정으로 서울 구경을 다시 하고싶습니다.^^  

 

활기찬 인사동 거리입니다.

제가 사는 광주에도 '예술의 거리'가 있지만 인사동의 인파는 언제 보아도 부럽습니다.

 

입구의 조형물입니다.

아이디어는 훌륭하지만 제가 만들었으면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겠습니다.

우선 붓대가 완전히 수직입니다. 맞습니다. 서예를 배울 때 붓대는 곧바로 세워야지요. 그렇지만 서예가가 신명이 나면

붓대는 움직이는 법.  붓대는 약간 기울게... 그리고 붓 끝도 약간 들려서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면... 어떨까요?

 

아시다시피 인사동은 아직까지 대한민국 미술의 1번지입니다.

매일 매일 수많은 전시회가 이곳에서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과거에 아스팔트 길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인사동엔 미술 말고도 많은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습니다.

10여년 전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 손님과 무턱대고 식당엘 들어갔다가 비싼 음식값 때문에 혼줄이 난 적이 있습니다.

 

 

왠지 두 사람이 닮아보입니다.

홀로 있음이 똑같고... 지쳐있음이 똑같고...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과 거리가 있는 점이 같아 보입니다.

주말 이틀동안 인사동에서 제가 본 이벤트는 깡통 인형 딱 한가지 였습니다. 거리의 화가들은 물론 없었고요.

무었이 인사동을 이렇게 허전하게 만들었을까요?

...

 

 

 우리나라 관광 상품의 현 수준입니다.

 

인사동의 굴욕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중국을 비롯한 다국적 골동품들이 외국 관광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사동의 변절입니다.  

이런 모습들 때문에 갤러리들도 경복궁 옆길이나 강남으로 자리를 옮기고, 인사동을 외면하는 발걸음도 차츰 늘고

있다고 합니다.

 

반가운 서점. 인사동의 참모습입니다.^^

  

쌈지길이라는 쇼핑쎈터를 구경했습니다.

 

 사방형으로 계단 없이 빙빙 돌아서 4층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꼬마가 떡을 쳐보려 애를 쓰지만 떡이 떡메를 내어주지 않습니다.

 

건물을 오르다보면 중앙의  인조고목 맨 위에  인형이 있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을 수 없군요. 아래사진...

 

이거 이래도 되나?  어린 학생들이 많이 오는 이곳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로? 성교육? 예술의 자유?

제 생각인데... 철거는 않더라도 예쁜 이불을 덮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모처럼 우리 골동품을 봤습니다. 가격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입맛만 버리니까요.^^

 

 옹기 그릇을 파는 곳입니다. 왼 편에 두껑이 있는 큰 뚝배기 보이시죠. 제가 접수했습니다.

저는 정말 주부 기질이 있는가 봅니다. 다음번에 이녀석으로 생선 조림을 선보이겠습니다. ^^

 

따사로운 햇볕이 좋은 그림자를 제게 주었습니다.

 

경복궁길 화랑가의 제2 학고재미술관입니다. 이곳에서 서양화가 강요배 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민미협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어제는 총회까지 주도하느라 바쁜 몸입니다.

덕분에 그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며칠동안 마시느라 지금은 그로기상태입니다.

그는 지금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제주도에서 작품활동과 함게 4-3제주항쟁바로세우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화가 중 한분입니다.

"요배 형, 나 인자 막걸리 얻어묵었응께 고흐전이나 보고 갈라요."

요배 형이 혀꼬부라진 소리로 말합니다.

"거길 왜 가니... 볼 거 없어... 걔 이제 겨우 30대야... 난 50대라구..."

듣고보니 정말 재미있는 비유였습니다. 잠시 후 강요배와 고흐그림을 쌈박질 부치겠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덕수궁 돌담길을 통해 들어갑니다.

 

아뿔사 오늘이 일요일임을 여기와서야 깨달았습니다.  한시간이 넘게 줄을 서야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자, 그럼 고흐의 전성기 시대 작품 '전나무가 있는 풍경'과 강요배의 '섬'(부분)을 함께 보겠습니다.

 

누구나 비슷한 생각이겠지만 반 고흐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화가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의 열정과 혹은 영혼을 높이 사거나, 아니면 그것도 모르면서 남들을 따라서 무작정.. 그럴듯...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학도 때 부터 반고흐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정열적인 화가 정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 유럽 여행 때 오르쎄미술관에서 '오베르의 교회'를 실견하고 그의 값어치를 인정했습니다. 그 그림 속의 짙푸른 하늘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거침없는 감성과 의지를 발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위의 그림을 보면 그의 한계가 쉽게 포착되기도 합니다. 사실 실제 그림을 보면 위의 사진보다 훨씬 꼼꼼하고 완성도가 높습니다.

바로 그 점이 그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고흐는 그림을 완성을 위해서 더 이상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왼 쪽 위의 해와 빛의 표현을 보면, 고흐는 감정을 상실한 채, 마치 콤퍼스로 원을 그리는 것처럼 정확하고 딱딱한 필체로 덧칠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강요배의 그림을 보겠습니다. 그가 그린 바다의 물결을 보십시오. 물결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려는 단서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파도위에 혹은 물결위에서 수영을 하듯...혹은 막걸리를 마시듯...비틀거리며 취권을 구사하듯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손끝으로 실려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진으로서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고흐 작품은 사진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림이 거칠고 단순하기 때문에 고흐의 단점을 숨겨줍니다.

그렇지만 강요배는 사진의 피해를 받습니다. 사진은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미묘한 색조와 터치의 느낌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강요배의 말에 일 리가 있었습니다. 고흐가 요절하지 않고 50세가 넘도록 살았으면 오히려 지금처럼 유명한 작가로 알려지지 못했었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좀 더 수준 높고 인생의 무게가 실린 후작들이 생산되었을 것입니다. 

 

서울 구경 잘했습니다.

 

담일(曇日) 캔버스에 아크릴릭 181.8*227.3cm 2007 강요배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