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 꽃으로부터...

머그잔으로부터...

철우박 2013. 1. 24. 11:11

머그잔으로부터…

 

아침 햇살 밴 그녀의 주름진 손이

에디오피아 이가체프를 곱게 갈 때면

싱그러운 과일 향기가 피어났었지

그녀는 언제나 새하얀 고깔모양 여과지에

깊은 바다처럼 짙은 커피가루를 담고

백자처럼 우아한 하리오 드리퍼에 드리워

내 정수리에 딸깍 올려놓았었지

황새 부리처럼 기다란 주전자의 경로를 타고

그녀의 뜨거운 체액이 가루를 적시면

봉긋 젖가슴처럼 부풀어 올랐어

따뜻한 나를 감싸던 그녀의 하얀 두 손

난 언제나 그녀의 포로가 되어 행복했었지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또박또박 얘기해주었지

항상 누군가에게 나직이 말해주었지만

난 언제나 한마디도 남김없이 엿듣고 있었지

잉그리드 버그만의 카사블랑크를 얘기하면서

그녀는 As time goes by를 흥얼거렸지

- 이것만은 기억 하세요 -

- 키스는 단지 키스일 뿐 -

- 후회는 그저 후회일 뿐 -

그녀의 이별 이야기는 정말 날 슬프게 했어

사랑했기 때문에 이별한 것은 결코 아니야

그녀의 이별은 처절하고도 살인적 이었어

결국 그 남자는 유죄를 받고 격리되었지만

그렇다고 미치도록 사랑했었던 한 때의 추억까진

다 버리진 못했어.

 

언제부터인가,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보내면서

나를 감싸주던 그녀의 포근한 두 손은 차갑게 식어갔어

우연히 허블 망원경에 포착된 식어가는 늙은 별처럼

그녀가 악몽 같은 기억에 빠질 때면 그녀의

푸른 얼굴이 내 몸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지

이가체프가 출렁거리면 사라지곤 했지만…

또다시 눈물이 떨어져 날 적실 때 마다 그녀의 얼굴은

흰부엉이박제처럼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었어

어느 날 의사선생님이 보호자를 불렀지만

봄날, 외로운 병실에서 그녀는 나만을 감싸쥐었어

그녀의 입술은 거친 성에가시처럼 갈라지고

흰 머리칼이 고독한 겨울비처럼 쓰러지도록…

나는 여기 507호실에서 다 보았어

힘겨워하는 한 여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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