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러시아 기행

울란바토르의 아침(1,2일째)

철우박 2007. 2. 5. 17:11

 

몽골(mongolia)에서의 첫 아침은 저의 기억속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것입니다.

왜냐면 우리 일행들은 어제 밤 늦게 몽골의 수도 울란바트로 공항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몽골의 첫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호텔에서 잠을 자는 동안의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깨어나서야  비로서 몽골의 참된 첫 모습이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네번째 사진)

 

광주민예총(사)에서는 "아시아의 가치를 찾아서"라는 프로젝트를 구상하여 그 첫번째로 몽골, 브리야트, 우즈베키스탄의 문학,예술가들과 교류를 통하여, 아시아 문화의 원천과 염원 그리고 미학적 가치의 발견을 위해 작은 첫발을 내 딛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이 첫번 째 대열에 합류하는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21일간의 여행이었습니다. 광주민예총에서는 우리 팀원 6명의 행적과 교류에서 얻어진 내용을 기반으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보고회를 개최할 것입니다.

 

저의 블로그에서는 보고자가 아닌 여행자로서, 여행중에 보고 느낀 생각들을 모아 날짜별로 정리하여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몽골과 브리야트를 겨울에 여행하실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천공항에서 수화물을 접수하기 위한 저희들의 짐입니다. 사진은 우리 일행 중의 한사람 분의 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화물을 접수하던 몽골항공사직원의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영하 30도... 공포의 추위에 대비하기 위해 다량의 의류와 양말은 물론, 스키 의류, 장고, 북, 탈춤소품, 노트북 2대, 김치와 밑반찬, 각종 생활용품, 사무용품,  선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작은 트럭 한대분은 족히 되었습니다. 결국 체중 오버(?)로 62만원의 추가 운송료를 물어야했습니다. 준비 과정에서 우리들의 결의는 대단했습니다. "물자가 남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다." 

 

 

 

울란바토르 공항입니다.

3시간의 야간 비행 만에 우리 일행은 공포의 영하 30도 울란바토르의 새벽 공기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입김이 폭폭 나오고 콧속이 아릿한 느낌은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덜 추운 느낌이었습니다. 듣던 바와같이 이곳 몽골은 기후가 건조하기때문에 생각 만큼이나 추위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몽골에 가면 별이 쏟아진다고 하였기에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아쉽게도 별들은 우리를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공항 검색과정에서 첫번째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수상하게 여긴 박스를 세관원의 지시에 따라 개봉하였는데 주머니용 손난로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얀 주머니에 어떤 가루가 가득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영어도 몸부림 국제어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주머니 손난로는 우리 일행이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하기 위해 제가 착안한 것이었습니다. 디카는 낮은 온도에서는 배터리 기능이 마비되어 작동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주머니 안에 손난로와 함께 두었다가 촬영을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마중나온 몽골의 친구 '푸렙'의 설명으로 가까스로 검색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추위에 강한 몽골 사람들은 주머니 난로를 사용하지 않는가 봅니다.  그들 생각으로는 주머니 안에 마약이나 대마초등의 물질로 오해할만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묵은 호텔의 이름은 '하라호름 호텔' 이었습니다. '하라호름'(카라코름)은 칭기스한(칭기스칸)이 대륙을 지배할 때의 수도 이름입니다.

호텔에서 아침 일찍 깨어나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엔 사원인줄 몰랐는데 시간이 좀 지나면서 승려들의 움직임을 보고 알아차렸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자그마한 이 사원은 '달라이라마'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 기증한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원이었습니다.

사원 뒷쪽으로 나지막한 동산이 있고, 몽골의 출근 행렬은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이 풍경은 제가 본 몽골의 첫 모습이었으며 저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호텔문을 나서면서야  우리는 어제 밤부터 우리 코를 자극했던 이 도시의 어떤 정체불명한 냄새를 확신했습니다.

울란바토르의 공기는 한마디로 고통이었습니다. 잿빛 하늘아래 매캐하고 뇌신경을 자극시키는듯한 냄새는 푸렙의 설명으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울란바토르는 한 겨울을 보내기 위해 대부분의 가정에서 석탄으로 난방을 합니다. 더욱 기가 막힌것은 무연탄(구공탄)이 아닌 원탄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원탄은 정제되지 않은 석탄으로서 각종 유해물질은 물론 다량의 일산화탄소를 배출합니다. 몽골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순간 몽골의 야만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또 한가지 푸렙의 설명은 자동차의 휘발유였습니다. 몽골의 휘발유는 무연이 아닌 유연 휘발유입니다. 이 역시 정제되지 않은 기름이므로 다량의 유해물질을 배출합니다.

이 두가지 요인이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잿빛 하늘과 죽음의 공포를 연출하는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울란바토르의 대기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오는듯 합니다. 그리고 15일간의 우정으로서 울란바토르에게 충고합니다. "그대들이여, 그 무엇보다도 울란바토르의 대기를 위해 투자하십시오."

 

푸렙의 말도 저와 같았습니다. 울란바토르 시민들의 가장 큰 염원이라고...

     

 

사원스케치 (펜)

 몽골에서의 첫번째 스케치입니다.^^

 

 

아침 공기를 가르고 맨 처음 푸렙이 안내한 곳은 '수후바토르광장'이었습니다.

울란바토르의 맨 중심지입니다. 아래 사진의 중앙청사(공사중)가 있으며 대규모 공연장, 은행, 정부청사등이 집결된 곳입니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 몽골 인민 국가를 세운  영웅 '수호바토르'입니다.

수호바토르는 1921년 중국으로 부터 외몽골을 분리시켜 몽골의 반쪽을 공산독립국가로 탄생시켰습니다.

수호바토르는 레닌과 동 시대 인물이며 친분이 두터웠다고합니다. 결국 몽골은 소비에트 연방에 합류되었다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다시 독립국가로 태어나고 1990년경 우리나라와 수교를 맺게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몽고반점을 배우면서 형제의 나라로 생각했던 몽골과의 수교는 70여년만에 이루어진 셈입니다.

 

 

현재 공사중인 중앙청사입니다. 청사 정면에 칭기스한의 거대한 동상이 앉아 있습니다.

이곳은 대통령의 관저와 함께 사용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칭기스한의 양쪽에 말을 탄 장수가 두명 있습니다. 이들 또한 칭기스한이라고합니다. 몽골인들의 칭기스한에 대한 엄청난, 때로는 무모할 정도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호바토르 광장을 거닐고 있는 몽골인들입니다. 노인 두 분은 몽골의 전통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몰골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부르는지 혹시 아십니까?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몽골인들은 중국을 '중국'이라고 부릅니다.

몰골인들은 일본을 '일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한국을 '한국'이라고 잘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솔롱고스'라고 부릅니다.

'솔롱고스'란 몽골어로 '무지개'를 뜻합니다. 다시말하자면 '무지개 나라' '무지개가 뜨는 나라'라고 부르는 샘입니다.

 

저는 너무 신기하고 기분이 좋은 나머지 푸렙에게 두세번을 다시 확인하였는데, 돌아온 대답은 "아따, 형님, 내 말을 그라고 못믿겄소?" 였습니다. 저와 푸렙은 만난지 하루만에 형님 동생을 하기로 했습니다.^^

 

'솔롱고스'의 어원은 두가지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몽골에서는 초원에 무지개가 빈번하게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지개는 동쪽에 뜨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쪽의 우리나라를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나라의 색동 옷을 보고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저는 그 점이 너무나 감동적이었고 금새 그들을 형제처럼 느끼게 하였습니다.

 

 

칭기스한의 동상밑에서 사절단 6명과 푸렙이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왼쪽부터 조진형씨(총괄기획팀장), 임남진씨(한국화가), 저, 김현경씨(마당극배우), 박강의씨(놀이패 신명 대표), 차소연씨(문화행정) 그리고 몽골의 인기 시인이자 작사가, 우리의 친구 '푸렙'입니다.

푸렙은 전남대학교와 교류하면서 수년간 한국어를 공부하였고,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먹는 다섯살박이 아들의 아버지이기도합니다. 

 

 

청사 근처에 있는 미술관을 들렸습니다. 아마 울란바트로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듯한 상설 미술관 같았는데, 마침 중견 화가 한분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분과 미술관 큐레이터 등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국에서 온 우리에게 매우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50점 정도의 작품 중 풍경화는 거의 없고 몽골의 전통과 현대의 삶을 담은 인물화들이 많았습니다.

 

 

 

이분의 그림들 중, 제 마음을 끄는 그림이었습니다. 여인이 베개를 베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수채화 인듯한데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저도 그림을 그리는 자 이지만, 마음에 드는 좋은 그림은 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래서 대뜸 얼마에 팔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화가는 크게 당황 하였습니다.

그리고선 주변의 큐레이터와 이사람 저사람에게 안절부절 묻더니...20만원을 요구하였습니다.

제가 몽골에 가져간 돈의 반 정도가 되는 액수였습니다. 결국 사지는 못했고 대신 이 분을 저녁식사에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하였습니다.

 

 

몽골의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하였습니다.

몽골의 근현대 미술작품들을 둘러볼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충격과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몽골을 방문하면서 경제적 문화적 우월감을 내새우고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가려진 마음 한 쪽에는 그런 마음이 숨겨져있었는가 봅니다.

 

생각과는 달리 몽골의 회화는 99%가 유채화 작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니 중국보다는 러시아에 귀속된 근대사가 자연스럽게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몽골의 자연, 황량한 벌판과 초원은 단조롭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지만 몽골 미술가들의 상상력과 표현력은 너무나 자유스러웠고 기상이 넘쳐났습니다.

탄탄한 사실력은 때론 램브란트의 인물화와 견줄만 했고, 대상을 이해하고 단번에 그려나간 유화 필체들은 인상파의 그것에 조금도 뒤쳐짐이 없었습니다.

특이한것은 몽골만의 야릇한 기상이 많은 그림에서 느겨져 다가왔습니다.

 

작품들을 보면 1930년대의 작품들도 눈에 많이 띠었습니다. 이 때 쯤에서야 나는 무릅을 탁 쳤습니다.

몽골은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습니다. 북한에서도 인민미술가가 있듯이, 이 분들이 당시 몽골의 인민 미술가였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의 미술가들은, 개인의 자유와 관심을 제외한 부분에서는 탁월한 기량을 발휘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화가 이중섭이 종이를 구할 수가 없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을 때 쯤, 이들은 국가에서 조달하는 캔버스와 유화물감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을 터이고요.  

 

미술관 측에 50달라를 지불하고, 실은 이보다 더 많은 작품들을 촬영하였는데, 몽골 전통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제 사진기를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옆에 앉았던 젊은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고 했을 때 눈치를 차렸어야 했는데, 몽골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비로서 알게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인것은 초기에 사진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만일, 만일에 마지막날 잃어버렸다면...아찔하군요.^^

화집을 구매해왔으니 나중에 몇 작품을 다시 보여드릴까합니다.

 

 

몰골의 샤머니즘과 관련이 있는 그림으로 보입니다. 300호 정도의 큰 작품입니다.

 

 

강렬한 색채와 이미지를 나타내는 작품입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 이면서도 북한 미술이 사실적인 작품 일색인것과는 달리 몽골 미술은 상당히 자유롭고 다양한 표현들이 많았습니다. 

 

 

 

몽골의 카우보이들이 말을 타고 가축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몽골의 시골 사람들은 말을 못타는 사람이 없습니다.

 

 

몽골의 패권적 기상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몽골의 전통 극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아마 우리 불교의 사천왕상 쯤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 합니다. 러시아의 브리야트 박물관에서도 이와 흡사한 탈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라셨지요?  '태극'은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것이 아니고 몽골것일수도 있습니다.

'수호바토르'가 이끄는 군인의 깃발과 국새에 에 태극 문양이 있는것을 박물관에서 확인하였습니다.

 

 

울란바트로의 시민들입니다. 유심히 보면 얼굴의 생김새도 그렇지만 패션에 있어서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몽골의 경제는 한국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몽골의 패션은 한국과 수평입니다. 울란바토르 근처 시골의 어린 학생들도 무척 세련된 옷차림이었습니다.

 

 

울란바토르의 가장 큰 백화점 앞에 있는 대형 스크린입니다.

 

 

거리마다 선전물들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울란바토르에 불고 있는 자본주의의 물결이라고 보셔도 틀림이 없습니다. 인구 100만의 울란바토르에는 차선이 없습니다. 지하철은 물론 없고, 지하통로 한 곳도 없고, 육교 한곳도 보지 못했습니다. 신호등도 꼭 필요한 곳만 있습니다. 차량의 신호만 있고 보행자를 위한 신호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유유히 차량들 사이로 거리를 횡단합니다.

 

 

몽골에는 참 희한하고 어처구니없는(한국사람에게만...) 도시의 풍경이 있습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는 광주처럼 많은 차들이 시내를 혼잡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차량들을 살펴보면 한국차가 반, 일본차가 반입니다. 특이한것은 한국차의 대부분이 현대자동차 제품이며, 일본차는 도요타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한국의차는 95%가 완전 똥차입니다. 이렇게 밖에 표현할수가 없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반면 일본차는 대부분이 반짝반짝거리는 새차들입니다.

 

이유를 푸렙이 설명해주었습니다. 몽골은 현재 우리나라보다도 더욱 심한 극도의 양극화를 겪고있다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엄청 돈이 많아요. 한국사람들보다도 많아요. 그래서 그들은 한국차보다도 안전성과 기능이 뛰어난 일본 �차만을 골라서 타지요. 반면에 서민들은 너무 가난해요. 그래서 한국에서 폐차 직전에 수입한 차를 타고 있어요."

 

우리 일행들은 푸렙의 말을 듣고서 한참을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 쪽팔리기도하고, 그나마 서민들의 발이 되어준다니 위안이 되는것도 같고...

 

하여튼 차선도 없이 움푹 움푹 패인 길을 한국차는 한국차대로 일본차는 일본차대로 덜덜대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외국에 나오면 두려워하지 않고 여기 저기를 돌아보는 용기가 좀 있습니다. 일본 여행 때도 벌벌 떠는 선생님들을 전차에 태워 시내 구경을 시켜주었습니다. 중국 여행때는 대열에서 이탈하여 '이화원'에 버려졌었습니다. 저는 굴하지 않고 조선족들을 찾아 함께 술도 함께 마시고 골동품도 구입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호텔 뒤 쪽에 있는 시장을 찾아 과일을 사왔습니다. 몽골 화폐의 단위는 '두구르크'입니다. 환율은 한국 돈과 똑같습니다. 위의 사진에 '1000'이란 숫자가 있습니다. 1킬로그램에 1000두구르크란 말입니다. 사과 1킬로그램에 우리돈 1000원이니 싼편이군요.^^

 

몽골의 시장에는 소세지 천지입니다. 소세지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고 맛도 좋습니다. 광주로 돌아온 지금도 숨을 크게 쉬면 목구멍에서 소세지 냄새가 나는것 같군요.^^

 

 

 

첫날의 마지막 일정입니다.

푸렙을 통해 몰골의 예술인들과 가벼운 상견례를 갖기로 하였습니다.

세미나에 앞서 얼굴을 익히고 이곳 실정을 파악하자는 취지였습니다.

'칭기스'라는 음식점에 우리 팀이 먼저 도착했습니다.

 

 

첫날은 생각보다 많은 예술인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전에 만난 화가와 큐레이터 그리고 음악가 한분을 고작 만났습니다.

 

퀴즈 한마당입니다.......한국사람과 몽골사람을 구별해보십시오.^^

 

한술에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내일을 또 바라본다.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