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러시아 기행

'칠라자브'와의 만남 (5일째)

철우박 2007. 2. 8. 17:30

 

여기는 울란바토르시의 한 종합병원 외과 대기실입니다.

어제 초원에서 한국 씨름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조진형씨가 그만 무릅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물론 상대는 저였습니다. 덩치로 보나 나이로 보나 제가 상대가 될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그러나 의리의 사나이 조진형씨는 일부러 저에게 져주었습니다.

받다리걸기와 들어메지기, 호미걸이를 서로 주고 받다가 제가 그만 조진형씨를 위에서 누르고 껴안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조진형씨가 뒤집기를 시도하면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이때, 갑자기 조진형씨가 무릅을 땅바닥에 찍었습니다. 서로 허리라도 다치는 것이 염려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몽골의 땡땡 언 땅바닥은 한국의 모래판과는 달랐습니다. "뿌가닥"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를 어쩔꼬?....

 

 

 

푸렙은 몽골에서 유명한 시인이기 때문에 아는 의사도 많습니다.

특진을 신청하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진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또 인내하지 못하고 이 광경을 찍고야 말았습니다.

제가 다시 태어난다면 촐랭이 사진기자가 될것은 너무나 뻔한 일입니다.

 

 

 

저의 장난기는 계속됩니다.^^

조진형씨의 무릅 X-rey 사진입니다.

몽골 의사왈 뼛조각 하나가 조금 떨어진것도 같다나????

 

 

 

겁이 덜컥 났습니다. 이러다 몽골 답사는 끝장난다....

몽골에서 유명한 연세대학교 병원을 찾았습니다. 아쉽게도 한국인 외과의사는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무릅사진을 다시 판정받고 이른바 뼈주사를 맞았습니다.

다행히 조진형씨의 무릅은 날이 지날수록 점점 좋아졌습니다.

 

몽골에서 씨름하지 마십시오. 오전 일정이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실은 오늘 오전 예정은 몽골 작가동맹 회장이신 '칠라자브'씨를 만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몽골 승용차의 번호판입니다. 저는 평소, 우리나라의 녹색 번호판이 세계에서 가장 촌스럽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새 번호판과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왼편엔 몽골 국기가 있고 'MNG'라는 국가 약자도 조화롭습니다. 숫자의 크기도 한국 번호판보다 커서 식별이 용이합니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새 번호판을 제작한 우리나라 공무원들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약이 없다."

 

 

 

 

점심 식사를 하러 들린 식당에서 훙미있는 장식을 발견했습니다.

아마도 지난 크리스마스를 맞아 장식한 듯 여겨집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몽골인의 70%가 라마불교의 신자입니다. 기독교인구는 1%도 채 안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렙의 말을 빌면, 크리스마스는 몽골에서 가장 사랑받는 명절 아닌 명절이라합니다.

 

문화란 정말 무섭습니다.

 

산타할아버지와 루돌프사슴코, 그리고 수많은 캐롤송이 없었다면 몽골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겠습니까?  실제로 푸렙의 아들 제르구네는 알만한 케롤송을 다 따라 불렀습니다.

 

과연 몽골에도 우리나라처럼 기독교가 강림할까요?  저의 가장 궁금한 생각입니다. 

 

 

 

수태차는 이런 모습으로 시내 식당에서도 맛볼 수 있습니다.

정말 맛이 있더군요^^

 

 

 

 

 

 

 

 

오후 첫 일정은 몽골 작가동맹회장 '칠라자브'씨를 접견하였습니다.

몽골 작가동맹은 1920년 창립된 몽골 최고의 문학가 연합체입니다.

칠라자브는 몽골의 유명한 민족시인이기도 합니다.

이제 갓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젊은 나이었지만, 초면에도 당당하고 자신감있는 그의 언행이 인상깊었습니다.

조진형 팀장이 우리가 몽골에 온 이유를 설명하고 칠라자브씨를 통해 몽골의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칠라자브는 1998년 광주에 온적이 있다고 하였으며, 그 이전부터 광주민예총의 작가회의 회원들과 교분이 있다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움이 되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마지막 날 푸렙의 집을 방문하여 한글로 번역된 칠라자브의 시 두편을 읽어보았습니다.

두편 모두 아버지를 모티브로 몽골의 유목민적 삶과 몽골인의 뿌리를 담대하고 장중하게 묘사한 시였습니다. 푸렙이 메일로 보내준다고 하였으니 나중에 첨삭하겠습니다.

  

세미나의 형식과 참여 인원, 장소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몽 예술인 세미나는 1월22일(월요일) 오후 4시에, 우리가 묵고 있는 하라호름 호텔에서 몽골의 예술인 30~40명을 초청하여 갖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칠라자브와 헤어진 뒤 국립 역사 박물관에 들렸습니다.

광주박물관보다도 작은 규모였지만 몽골의 자존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입구에 칭기스한을 나타내는 조형물인가봅니다.

 

 

 

 

몽골의 의관은 예상했던것 보다 훨씬 섬세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의 복식입니다.

 

 

 

 

유목 생활에 필요한 기구들입니다.

몽골은 한반도의 7배 면적을 가지고 있지만 농사를 짓는 곳은 없습니다.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합니다.

농사를 짖기에는 연간 강우량이 절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칭기스한이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고합니다.

 

" 몽골에서 유목을 포기하고 농사를 짖는다면, 몽골은 분명히 멸망하고 말것이다."

 

 

 

 

게르의 구조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게르는 먼저 나무살을 이용하여 X자 엮음으로 지은 다음, 양모천를 이용하여 추위에 대비합니다.

여름철에는 나뭇살이 양쪽으로 드러나게하여 공기를 소통시킵니다.

 

 

 

매우 섬세하고 탄탄한 벼슬아치의 의복입니다. 몽골에서는 왕을 '한(칸)'이라고 부릅니다.

 

 

 

드디어 볼것이 왔군요,

이 깃발 문양은 몽골의 건국 영웅 '수후바토르'가  사용했던것입니다.

아래 쪽에 작고 네모진것이 수후바토르의 국새입니다.

여기에도 똑 같은 모양의 태극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요즘 친일행적으로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박영효의 태극 문양은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의 사당이나 서원의 문에 척귀(귀신을 물리침)용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몽골의 태극과 한국의 태극은 한 형제임이 분명하지 않을까요? 

 

 

 

죄인들을 가두어 두었던 이동식(?) 감옥입니다.

어떤 이가 앞의 큰 구멍으로 목을 내어 놓고 가두어 둔다고 하여, 제가 바로 잡아 주었습니다. 죄인을 가두어 두고 음식을 넣어주거나 대소변을 받아내는 구멍일거라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에 가두어 둘 인간들이 많습니다. 

미성년자를 납치하는 자, 힘들여 거둔 농산물을 훔치는 자, 죄를 짓고도 돈이 많아 특혜를 받는 자, 정치나 권력을 이용하여 재산을 축척하는 자, 아파트에서 남들 불편하게 주차하는 자.

 

 

 

한국의 징과 100% 똑같습니다.^^

 

 

 

아이쿠, 깜짝이야.

호텔 옆 시장 계단의 벽에 붙어있었습니다. 비의 사진 왼편을 보십시오.

솔직히 공공장소에서 이런 경우는 한국에도 별로 없는데...쩌~업!

 

제 생각으로 몽골의 소비문화 그리고 위와 같은 문화는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이미 몽골에서는 연예인들이 엄청남 부를 가진다고합니다.

아무리 어떤 곡이 히트를 쳐도 가수만 배부르지, 작곡가와 작사가는 가난하기 이를데 없다는 푸렙의 푸념이 있었습니다. 푸렙은 몽골에서 유명하고 잘나가는 작사가이기도 합니다.

 

현 엥흐바야르 대통령은 그래도 오직 경제만을 위해 올인한다고합니다.

 

몽골의 순수와 예술이 한국처럼 자본에 떠밀려 상처입지 않을지, 형제로서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몽골의 대중 교통수단을 보고있습니다.

몽골에는 버스가 없습니다. 그대신 봉고차가 그것을 대신합니다.

아마 대부분이 한국산 쌍용 '이스타나'일것입니다. 러시아의 봉고차도 대부분 '이스타나'입니다

한국에서 단종된 이스타나나 몽골과 러시아를 누비는 이유는 전륜구동형식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봉고차는 모두 후륜구동이지만 이스타나만이 눈길에 강한 전륜구동입니다.

 

 

 

비로서...목놓아 기다렸던...인터넷이...5일만에야 연결되었습니다.

호텔에서 가장 수신률이 높은 방으로 옮기고, 기술자가 수차례 오고 나서야 비로서 개통되었습니다.

인터넷이 개통되지 않았으면 이번 행사는 큰 차질을 빗고말았을것입니다.

 

 

 

오후에는 몽골의 전통음악과 춤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마침 눈이 내렸습니다. 몽골에는 많은 눈은 내리지 않는답니다.

 

 

 

 

아담한 무대에 테이블이 놓인 객석인데 50~60명 정도만이 관람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무대 위에는 전통 악단이 자리잡고 있으며 무대의상은 무척 화려했습니다.

전체 단원들도 수십명이 넘게 보였는데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첼로를 연상케하는 '모린호르'라는 전통 현악기입니다 

줄이 두개에 불과했지만 음역이 만만치 않았고 소리 또한 부드럽고 다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체격이 좋은 가수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고 우렁차게 몽골 특유의 전통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 모두가 놀라운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아니?.....사람의 목에서 나는 소리 맞아?....엄청난 공명을 일으키는 소리였습니다.

야수의 울부짖음 같기도 하고 동굴의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생전에 처음 들어보는 인간의 소리였습니다.

이런 음악을 '허매'라고 합니다.

 

짐작하건데, 몽골의 샤머니즘에서 유래된 소리인것 같습니다.

 

이 소리는 한국의 '창'처럼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소리가 아니랍니다.

세미나 편에서 이 소리를 소개할까합니다.

 

 

 

라마불교의 색채를 보여주는 집단 무용입니다.

무대의 가운데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인도의 요가처럼 몸을 마음대로 비틀고 구부리는 연기를 어린 아이들이 펼칩니다.

 

 

 

티벳의 여러개의 팔이 달린 불상이 연상됩니다.

 

 

 

이 극은 인디언들의 샤머니즘을 연상시키는 무용이었습니다.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주변을 무대로 번성한 우랄알타이-퉁구스 어족들은 남으로는 한반도, 동으로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흘러갔다는 학설이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20명도 채 안되는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연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찬 연호와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주었습니다.

 

 

 

공연장 밖으로 나오니 진풍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로의 교차로, 즉 로터리에 스케이트장이 있었습니다.

광주로 친다면 도청앞 분수대 자리에 스케이트장이 있는 셈이네요.^^

 

 

 

어쩔수 있습니까?

오늘 하루도 또 김치로 마무리 해야죠.^^

 

그렇지만 이곳은 한국식당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킨 음식은 양갈비탕입니다.

 

몽골은 어느 식당에서도 600원 정도를 지불하면 밥 또는 김치를 먹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김치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