넋두리

동심에 젖다

철우박 2008. 6. 23. 15:01

 

창피해서 이런 얘기를 해도 될런지... 

지난 주, 어느 날 밤,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민미협 회의를 마치고 회원들과 막걸리를 기분좋게 마셨습니다.

광주의 금남로 옆 골목길에는 영흥식당에서 부터 서민들이 주로 찾는 유명한 선술집이 몇군데 있습니다.

이곳에서 마시는 무등산 막걸리는 값싸고 맛있기 때문에 단골 술꾼들이 날이면 날마다 성황을 이루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저희 일행들은 대낮의 끝 무렵부터 막걸리 파티를 시작하여  자정 무렵에야 끝이 났습니다.

 

동료들과 헤어지고 난 후, 저는 택시를 타고 우리 아파트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는 기분 좋게 술마신 날은 바깥사람을 아파트 앞 호프집으로 불러내곤 합니다.

대부분 거절을 당하고 말지만, 운이 좋은 날은 바깥양반과 함께 기분좋은 2차를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늘따라 전화를 받지 않는군요. 휴대폰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당신 시방 집구석에 안 있고 어디 있는가?"

 

우리 부부는 입이 좀 갖어서 '집구석'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요. 신혼 초에 궁색한 셋방 살림에 대한 자조적인 표현으로 '집구석'이라는 표현을 자주 했었는데, 

어느 날, 다섯살 먹은 큰 아들 승조의 입에서 '집구석'이라는 말이 툭 터져 나오는바람에 우리 부부는 요절복통과 함께 깊은 반성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반성 이후로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당시의 기억을 부부가 함께 자꾸 회자를 하다보니 이제 '집구석'은 '우리집'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바깥양반께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먼 일로 이렇게 일찍 들어왔다요? 오늘은 내가 모처럼 옛 동창들과  만나 시방까지 재미지게 놀고 있어라. 집구석에는 쪼끔 더 있어야  들어갈 것 같응께 지달리지 마씨요."

당당한 그녀의 말이 어이없게 귓속을 울렸지만 저는 조금도 반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야말로 그녀가 결혼 전에는 한 방울도 못마시던 술을 끈질기게 가르쳐준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나 저나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들어가기가 썩 내키지 않아, 일단 아파트 현관 앞 밴치에 잠시 앉았습니다.

그리고 머리 속에 떠오르는 몇가지 상념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비행기 놀이터가 두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 아파트에 입주한 후 부터 3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관 바로 앞의 놀이기구에 한번도 올라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놀이기구는 비행기 모양을 본 떠 만든 것인데 조종석은 물론 객실도 있고 미끄럼틀도 있는 최신형이었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젊었을 때만 해도 아파트 단지 내의 그네나 놀이시설은 반드시 시승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제가 시승을 한 이유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점검 차원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솔직히 말해서 호기심 또는 동심이 발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새 저의 몸은 비행기 모양을 한 놀이기구의 밧줄 그물을 타고 정상에 올라와 있었습니다.

모처럼 높은 곳에서 컴컴한 주위를 바라보니 막걸리 기운과 동심이 섞여서 기분은 한껏 고조되었습니다.

정상에는 커다란 원형 구멍이 있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미끄럼틀은 대부분 튜브형으로 되어있더군요.

기분도 매우 좋은데 한번 타볼까?  누구 보는 사람은 없나?  주변은 이미 어둡고 고요했습니다.

 

자세를 낮추고 튜브의 입구에 걸터 앉아보았습니다. 어라?  생각보다 구멍이 좁더군요. 어깨에 메고 있던 카메라 가방이 입구에 걸려 몸을 넣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가방을 옆에 벗어두고 몸을 넣었다가, 다시 몸을 뺀 후, 가방을 배 앞으로 들쳐 메었습니다. 이유는 하산을 했다가 다시 가방을 가지러 올라오는 수고를 덜기 위함이었죠.  

자, 준비완료. 가자! 동심을 찾아서... 나는 야, 어린왕자...

....

 

미끄럼틀의 튜브는 짧았지만 저의 동심을 향한 마음은 한없이 길었습니다. 길고 긴 어둠의 터널 여행을 끝내고 아쉬운 마무리를 하려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뇌에까지 전달되지 못했지만, 저의 어떤 동물적 감각에 의해 순간, 동작을 멈추었습니다. 신발 뒷꿈치를 지나 바지가랑이가 서늘하더니 그 순간 당면한 상황이 저의 뇌에 정확히 전달이 되었습니다.  

'아,,,물이다."

 

왜 일까? 왜 이곳에 물이 고여있을까? 또다시 저의 뇌는 고주망태 상태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아!,,,그렇구나,,, 튜브 아래쪽이 어린애들의 가속도를 줄여주기 위해 움푹 들어가도록 설계가 되어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어제는 큰 비가 왔었고 튜브 끝에 움푹 파인 곳에는 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낭패가... 

'내참, 배수 구멍도 없이 설계를 한 그 자식 똑똑하기도 하군...' 라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제 진정 저를 위한 사고가 필요한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경우의 수는 둘. 하나는 후진. 둘은 직진.

 

물론 첫번 째 선택은 당연히 후진이었습니다. 양 다리를 굽혔다가 발에 힘을 주고 뒤쪽으로 쭉 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닥이 젖은 신발은 이내 미끌리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제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가방 줄은 목에 걸고... 사진기와 신변잡기가 담긴, 무게가 제법 나가는 카메라 가방은 저의 불룩한  배 위에 놓였고... 양 다리와 팔은 쫙 별려서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고, 그러한 육신의 형상을 굳이 설명하자면 개구리 또는 사마귀의 형태로 한 밤중의 튜브 속에서 난감한 몸짓을 하고 있던 셈이지요.

이번에는 양 손바닥을 튜브 옆으로 밀착하고 뒤로 오르기 위해 온 힘을 써 보았습니다만 역부족..... 이럴 줄 알았으면 헬스클럽이라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근력을 좀 더 키워놓았어야 하는데... 불쌍한 어른 개구리는 계속 처절한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오히려 그에게 다가오는건 탈진과 상실감 뿐이었습니다. '아이고 인자 어쩐다냐?... 

 

밤은 점점 깊어만 가고...이제는, 보다 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아쉽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어떤 일은 때때로 포기해야할 때도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들이대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나이 불혹과 지천명을 훌쩍 넘어 이순을 바라보는 참에 그런 무모함은 어울리지 않겠지요.

 

저는 유서를 쓰는 마음으로 저의 최후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도 정신만큼은 바짝 차리자. 몇년 전에도 술마시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바다로 뛰어들지 않았던가? 나에겐 이제 한가지 길 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직진'이로다. 이제 남은 건, 사진기와 휴대폰 구하기를 하여야 한다...너 자신을 알라...

 

누운 자세로 먼저 휴대폰을 바지 호주머니에서 빼내어 배 위의 가방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아차차,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도 꺼내 역시 가방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 속의 몇 가지 잡동사니도 같은 방법으로 처리했습니다.

'난 정말 스스로 생각해봐도 대견해. 다른 녀석 같았으면 살려달라고 소리쳐 경비아저씨께 창피를 당했거나 아니면 우선 나가고 보자는 생각에 휴대폰과 카메라마저 망쳤을거야... 어느 새 몇년 전 바닷가에서의 잘못된 스스로의 모습은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최후의 행동 개시!

비록 비참한 선택이었기는 하지만 저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선'이란, 바지와 상의는 비록 물에 젖더라도 요즘들어 더욱 애처롭고 하얗게 드러나고 있는

저의 뒷 머리통 만큼은 이 굴욕에서 벗어나고 싶은 의지였습니다.

 

저의 몸은 수평 막대기를 앞에 두고 림보를 하는 것처럼 자세를 유지한 채,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는 중입니다.

가장 먼저, 큰 맘 먹고 며칠 전에 백화점에서 새로 구입한 랜드로버 드라이빙 슈즈가 물에 잠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신발을 먼저 밖으로 내 던졌어야 옳았습니다.

그리고 바지의 아랫부분이 기분 더럽게 차가와 지더니, 그 기분이 저의 등을 타고 점점 미끄러져 올라왔습니다.

 

이제 자세는 무거운 가방을 뱃살 위에 올린 채, 최대한 천장을 향하고 세계 챔피언급 수준의 림보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양 팔꿈치는 물 속에서 견고하게 불쌍한 제 머리통을 치켜세우려고 안간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뿔싸! 이 튜브를 설계한 그 자의 두뇌는 저의 두뇌보다 한 등급 위인 것을 깨닫고 말았습니다.

그 자는 마치 이같은 액시던트를 예상이나 했던 것처럼, 아이들의 안전성을 핑계로 고 난이도로 설계해 놓았던 것입니다.

 

부르르~~~

부르르르~~~

죽기 직전의 그 어떤 몸짓을 두어번 하고는 저의 불쌍한 뒷머리마저도 급기야 잠수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온 몸을 물 위에서 굴욕적으로 일자로 눕히고서야 겨우 악마의 늪에서 빠져나온 저는, 미처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생쥐처럼 혼자 몸을 뒤척였으며 카메라와 휴대폰을 구한 탈출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젖은 뒤통수에 대한 불만과 자조로 가득찼었습니다.

 

오늘 밤 저의 최고의 실수는 다름이 아닌, 제가 한 말을 제 스스로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바로 조금 전의 생각' 말입니다. 처음부터 뒤통수를 포기했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

 

누군가와 마주치지나 않나 하는 긴장감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결국 나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이 초라한 사람을 반기는 그 누구도 집안엔 없었습니다.

작은 녀석은 기숙사...

큰 녀석은 학교 도서관...

바깥양반은 전과 동...

 

.....

 

불을 켠 후, 신발을 뒤집어 물을 빼고, 젖은 옷을 하나 둘씩 벗으면서 완전 알몸이 된 후,

저는 오늘의 사건에 대한 총체적 반성을 해보았습니다.

 

'박철우, 제발 이제 나이값좀 해라...'

 

왜 저는 이런 상황에서도 또 블로그 생각을 하는것일까요?

벗어 던진 옷을 주섬주섬 모아놓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셔터를 누릅니다.

 

한 여름 밤의 꿈이 아닌 현실이었습니다.

 

ㅠㅠ

 

 

 

 

 

 

 

 

공포의 튜브...

비가 오면 물이 고인 사진으로 교체하겠습니다.

ㅠㅠ

 

빗물이 고인 사진입니다.

이 정도에 당하다니? 가방을 안 매고 몸만 앞으로 숙일 수 있었어도...억울합니다.

접시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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