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사다리전 도록에 실린 글입니다.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 어느 날, 난 조선대학교 근처 백제화실 옥상에서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빨래를 널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빨래는 단순한 게 아니었다. 대청소와 비슷한 것. 그러니까 말을 붙이자면 겨울철에 딱 한번 하는 대빨래였던 것이다. 30평 정도의 옥상에 빨랫줄이 대각선을 그리고 중간 부분에는 마치 솟대마냥 못이 박힌 긴 각목이 배흘림기둥처럼 휘어져 있었다. 난 이미 대학 4학년 때 설치미술을 시작한 것이다. 기막힌 것은, 맨 먼저 널었던 스웨터 나부랭이부터, 청바지, 돕빠, 물들인 야전잠바, 털목도리, 두꺼운 양말, 면 빤쓰 등등이 순서대로 꽁꽁 얼어붙은 것이다. 일상적 리얼리티를 시간 개념을 투사시켜 표현한 그런 작품인 셈이다.
이제 남은 서너 벌만 더 널고 나면 이 작품은 아무도 보지 않는 외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는 것이다. 맑은 하늘을 배경삼아 참새 떼가 후두둑 지나간다. 건물 앞으론 구닥다리 시내버스가 덜컹거린다.
워메! 들리지 않는다. 참새도 버스도 그 어떤 소음들도 내 귀엔 들리지 않는다. 망연자실.세상에 이런 일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나였지만 “하나님!”하고 외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추스르는 일만 남았다. 묘안이 떠오를 리가 없다. 몸 가는대로 따라갈 수밖에. 상점에서 4홉들이 소주를 사들고 왔다. 이 상황에서 유리 소주잔은 불필요한 액세서리일 뿐이다. 널찍한 스텐레스 국그릇에 뚤뚤 따라 연거푸 원샷! 원샷! 또 원샷! 속이 빈 위장이 원인이기도 했겠지만 군대에서의 사건을 뺀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혹독하고 어지러운 밤을 새운 것이다.
이틀 후에야 옥상 바닥에 널부러진 빨래들을 주워 모아, 비좁은 화장실 한쪽에서 다시 깨끗이 행군 후, 튼튼한 새 빨랫줄을 치고서, 나의 최초의 설치미술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해 겨울이 그렇게 지나갔듯이, 우리들의 젊은 날들도 그렇게 시리고 시리게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너무나 순수했다고 하면 자화자찬일까? 아니 몽상적이라고 비아냥거려도 좋다. 우리들은 정말 순수했었으니까. 어쩌다 푼돈이 생겨도 혼자 먹는 법은 없었다. 비록 포장마차에서 막걸리 한잔에 홍어 안주 한점이라도 반드시 함께 나눠 먹었다. 연탄불이 꺼진 화실에서 동그란 의자 세 개 위에 화판을 깔고 다음날 아침까지 떨어지지 않고 잘도 잤다. 그러면서 아침이면 수채화 물통의 흐린 물에다 대고 이렇게 뇌까렸었다. “짜식, 얼어부렀네...”
당시 우리는 반항아들이었다. 미대 교수님들께 찍힌 놈들이 한두 놈이 아니었다. 보수적인 이 지역 화단에서 교수님들은 젊고 어린 제자들의 치기어린 붓놀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기에는 할아버지(오지호 화백)를 비롯한 대부분 교수님들이 격려와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주셨다. 그러나 우리들은 정례 학습 모임을 통해 우리 화단의 질곡적인 면과 보수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밤을 새우는 토론은 이미 일상이 되었으며 한국미술사, 동서양미술사, 미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둘씩 깨우쳐 나갔다. 화실에서는 물론 대학 실기실 안에서 조차 우리들은 우리가 깨달은 대로 질풍노도와 같이 달음질쳐 나갔다. 특히 공모전의 폐단을 함께 토론한 이후에는 거의 대부분의 회원들이 공모전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진실한 화가로서의 길을 선택한 소중한 사건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시 사다리 회원들은 학교에서 한 그림 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린 녀석들이 공모전을 거부하니 교수님들이 당연히 발끈하신 것이다. 결국 이 반항아들이 말년(4학년)에 들어 졸업 작품을 제작할 무렵, 이번엔 교수님들이 지도를 거부하고 그림 앞을 묵묵히 지나치는 풍경이 미대 곳곳에서 목격된 것이다.
지금 나는 그 시절 교수님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두 가지 정도 이유가 있다. 하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이다. 그분들 스스로 스승에게 대들지 않고 배워왔던 분들이기에 그럴 만도 하였다. 그리고 적어도 제자의 앞길을 걱정해 주신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금에 와서 그 당시 교수님들의 작품세계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들이 당시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나의 경우는 거꾸로 뒤 바뀐 듯 하다. 교수님 작품이 모던해진 반면 나는 오히려 뜻하는 바가 있어 자연주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가끔씩 뵙고 막걸리 한잔 대접해드리며 옛 이야기 나누는 것이 행복한 일 중에 하나가 되었다.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30년 전 우리는 똑같은 청바지에, 똑같은 뽀삐 물감에, 똑같은 막걸리에, 똑같은 ‘순수’를 먹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긴 길을 각자 걸어왔다. 사실 우리는 이제 다르다. 과연 얼마나 다를까? 서글퍼진다. 슬플 정도로 다르다. 우리에게 끈질긴 인연이 있었다면 그것 못지않게 우리에겐 큰 이별이 있었다. 그리고 각자의 얼굴을 바꾸고 마주 서있다. 누구에게든 충고나 자기 생각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이미 우리는 젊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앞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그것만이 살아남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언제 날 한번 잡아, 하루 저녁만이라도 ‘순수’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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