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여행...

마이산 종주

철우박 2007. 9. 9. 10:38

 

마이산(馬耳山)에 다녀왔습니다.

전라북도 진안 고원에 있는 두개의 암봉으로 형성된 산입니다.

 

봄에는 안개를 뚫고 나온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하여 '돛대봉', 여름에 수목이 울창해지면
           용의 뿔 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의 귀 같다 하여 '마이봉', 겨울
           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여 '문필봉'으로도 불리웁니다. 


 

 

흔히 마이산을 구경하러 가시는 분들은

탑사에 들려 돌탑과 산 봉우리만 보고 오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지도에서 보듯이 보흥사와 마이산을 잇는 아름다운 등산 코스가 있습니다.

 

오늘 등반은

보흥사 입구에서 출발하여 광대봉, 고금당, 비룡대, 삿갓봉을 거쳐 탑사로 진행하겠습니다.

  

 

보흥사 입구에 때 이른 코스모스가 객들을 반겨줍니다.

 

 

등산로 입구입니다.

먼 곳에서는 마이산이 보이지만 오히려 가까운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흥사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사찰입니다.

대웅전 하나만 덜렁있는 작은 절입니다. 대웅전 문지방에 참깨를 말리고 있습니다.

절 주변에는 살림살이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습니다.

대부분 지방문화재들이 겪는 서러움입니다.

 

 

올 여름 지루한 장마 탓인지 산 등성이는 벌써 이른 낙엽으로

쌓여있었습니다.

 

 

요사이 몇일 밤낮을 끊임없이 내렸던 비가 개이고

대신 마이산 계곡엔 물 흐르는 소리로 실내악이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마이산의 남쪽과 북쪽 경사면에서는 섬진강과 금강의 지류가 각각 발원한답니다.

아마도 이 물은 흘러 섬진강을 따라 몇일 후면 광양만으로 빠져 나갈 것 같습니다.^^

 

 

시작부터 상당한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등산로의 길이는 그렇게 길지 않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만만하게 볼 산은 결코 아닙니다.

4시간 정도 소요.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겨준 봉우리는 '광대봉'입니다.

이 광대봉에는 50미터 정도 길이의 밧줄이 설치되어 있는데, 현재는 입산 금지구역입니다.

아마도 잦은 사고로 인해 폐쇠된것 같습니다.

 

 

광대봉을 옆으로 바라보며 고금당을 향합니다.

 

 

 

드디어 마이봉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왼쪽에 솟아있는 암마이봉은 673m 오른쪽의 숫마이봉은 667m입니다.

 

마이봉 왼편으로 봉두봉과 비룡대 전망대가 보입니다.

제법 멀리 보이지만 등산이란게 가다보면 금방입니다.^^

 

 

 마이산의 기반암은 매우 독특합니다.

역암(수성암)이라고 불리우는 이 바위들은 마치 모래와 자갈을 버물린 시멘트 콘크리트를 연상시킵니다.

 산 전체가 거대한 암석산이지만 곳곳에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예쁜 도토리가 바람에 끊겨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곳 마이산 일대는 대단위 참나무 밀집 지대이기도 합니다.

 가는 길 바닥에 다양한 도토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마이산이 하나로 보입니다.

암마이봉이 숫마이봉을 완전히 가리고 있습니다.

그 순간 신기하게도 남자 등산객들은 모두 다리를 휘청거리며 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

 

신라시대에는 서다산, 고려시대에는 용출산이라고도 했으며,

조선시대부터는 산의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이녀석은 일명 상수리라고 불리는 녀석입니다.

 

 

이곳은 '엉덩바위'입니다.

바위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로 생성됐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겁나게 큰 바위입니다.^^

  

 

 

마이산 자락 품 안에 '금당사'가 보입니다.

황금칠을 한 사찰이 낯설게 보입니다.

 

 

 

고금당에 도착했습니다.

작은 사찰인데 고금당 역시 기와를 금분으로 도색했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고색이 짙은 청기와를 좋아합니다만, 이 곳  스님들은 황금을 애호 하시는가 봅니다.

 

 

해우소도 황금 지붕입니다.

실제 금가루로 칠했다면 등산객들이 모두 긁어가고 말것입니다. ㅋ~

 

 

 고금당에서 바라본 비룡대입니다.

이제 저곳에 닿으면 맛있는 점심을 먹게될 것입니다.

어서 가자^^

 

 

이 녀석은 매우 야무지고 단단해보이는군요.

 

 

비룡대에 거의 다달았습니다.

 

 

나봉암(비룡대) 전망대입니다.

 

 

비룡대에서 바라본 마이봉입니다.

암마이봉의 오른쪽으로 보였던 숫마이봉이 이곳에선 왼쪽으로 드러나 보입니다.

   

 

 비룡대 뒤쪽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마이산 등산로의 비탈길들은 이처럼 자동차 타이어를 이용한 덕석?으로 덮혀 있습니다.

토사의 흘러내림을 효과적으로 방지해주거니와 미끄럼을 방지해주니 좋더군요.

 

 

 

참나무숲 속의 큰 버섯입니다.

손바닥 만큼한건데 이런거 잡수시면 복통에 설사 또는 돌아사시는거 아시죠?

 

어떤 등산객은 싸리버섯을 한 웅큼 캐서 들고 다니더군요.

그래서 저도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봤지만 허사였습니다.

어렸을 적 그렇게 흔했던 싸리버섯이 다들 어디로 갔는지...

 

 

 

가던 발검음을 멈추고 잠시 뒤를 돌아봤습니다.

아름다운 산을 등반할 때 가끔은 뒤돌아보는 것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암마이봉 아래쪽에 도착했습니다.

습한 북쪽 사면은 식생이 풍부하나 이곳 남쪽 사면은 건조하여 식생이 빈약한 반면 풍화작용으로 암석의 측면에 동굴 형태의 구멍이 생기는 타포니(taffoni)현상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탑사 입구입니다.

 

 

 

오늘따라 하늘이 아름답습니다.

 

 

 

왠 단풍이냐고요?

탑사 입구에서 판매하는 사진을 보고 촬영했습니다.

가을 단풍이 절정일 때 이곳을 찾으면 최고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탑사 입구에 어린이들의 돌탑 쌓기 체험활동 흔적이 있습니다.

 

 

 

 탑사(塔舍:전라북도 기념물 제35호)는 자연석으로 절묘하게 쌓아올린 원추형기둥과도 같은 80여 개의 돌탑이며, 마이산 신 등을 모시는 탑이 있는 암자입니다. 쌓아올린 지 100여 년이 지났으나, 강한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아 더욱 신비감을 주며 중생들을 구제하고 만인들의 죄를 속죄한다는 뜻으로 만불탑이라고도 부릅니다. 

 

 

 

 

 마이산 탑사는 이갑룡에 의해 건조되었습니다.

한국의 불가사의 마이산 탑사원본의 글을 축약하여 소개합니다.

 

1860년 효령대군 16대손으로 출생했던 석정의 본명은 이 경의, 호는 이 갑룡이라 하며 16세때 부모님을 여의시고 외로움을 달래며 이산 저산 이절 저절에서도 자리 잡지 못하시고 결국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인생을 살아야지 하며 전국을 누비시다가 거창에서 장수로 임실 둔덕으로 넘어가실 무렵 어느 두 봉우리가 이 갑룡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1885년경 나이 25세 되던해 젊음을 이곳에 묻으라 하신다. 유,불,선에 바탕을 두고 龍華世界의 실현이 이상적이라 믿고 구도의 행각 끝에 수도에 들어갔다.
 
마이산에서 남자산이라는 지리산이 200리, 여자산이란 계룡산이 200리 그 한복판의 마이령봉은 남녀 두 봉우리가 역역하고 그 절묘함이어느곳에 비 할 수없어 그 정기로 사바세계를 개척 하리라 마음먹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행을 자처하며 1기,2기, 쉬지않고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세속과는 완전 등진채 낮에는 돌을 날랐고 밤에는 기도 하다 자시에 돌탑을 하루에 한층씩 30여년동안 인간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108기의 탑을 쌓으면서 108 번뇌를 해탈 하고자 108개의 석탑을 구상 자연석을 탑촌으로 하나둘 올려 놓으면서 뭇 중생이 짖는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 일관 하며 탑을 완성될 동안에는 사람이면 고독을 느껴서라도 하산의 길을 떠나 세속에 묻혔을지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완성 했으니 이미 석정은 그때부터 영의 힘에 의 그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탑을 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더욱이 받임대(기둥) 하나 없이 가파른 탑신을 축지법으로 오르내리며 누구의 도움 하나 빌리지 않고 돌탑들은 전국의 명산 각지를 순례 할때 산항에 기도하고 돌아올때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배낭에 지고 와서 탑신에 섞어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석 석탑은 세계 조탑사에 비추어 그 유예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석으로 탑군을 축조 하였는데 주탑인 천지탑은 같은 형태로 원형의 기단부로 부터 70%도 정도로 타원형인 포물선을 그리며 유유히 뻗어 상륜부에 해당하는 윗 부분은 잔석으로 괴여 힘이 눌리고 흔들릴때 쿳숀 역할을 하고 자연판석을 그대로 올리고 높이 15m로 쌓아 올렸다 한다.
 
원추형으로 쌓은 두 천지탑은 알맞게 조화를 이룬 수법은 역학적 인면에서 보다 자연석으로 조탑 했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착상에 경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탑의 신비와 가치는 그러한 축조 기술보다 하나 하나의 조형미와 전체적인 조화미에서 오는 감동인데 펑퍼진 기단부로 부터 유연히 뻗어오른 선의 미와 육중한 탑신의 중량감에서 탑봉의 예각이 주는 섬세 하면서도 신비한 아름다움을 주는 법열이다.
 
더군다나 돌로 이어지는 패턴은 절묘함과 처연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높고 낮고 크고 작은 탑의 배치는 단순한 가운데 다양한 변화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탑군은 저마다 입부리를 하늘을 향해 애절한 염원을 소원 하는듯 하다.
 
자연석과 같은 암반으로 형선된 마이산의 산세를 이용하여 이 공간에 높고 낮고 체감율이 뾰쪽한 탑과 원추형의 탑을 알맞게 조화시켜 황홀하게 구조한 배치의 솜씨는 범중생은 생각 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 배열은 팔진도법을 적절히 이용 하였으며 각각 다른 탑형은 음,양의 이치르 살렸으며 높고 낮은 구조는 환생과 오행의 이와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신비의 전경을 이루게 했다.
 
이와 같은 조탑의 근본적인 원리 보다는 갑룡의 천부적인 미적감각이 뛰어 났던 것이며 이러한 조형 의욕이 작품으로 형상화 하였을 것이다.
 
그는 또한 고된 작업에서도 자기의 뜻이 공간속에 이루어져 가는 탑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조화속에 도취되고 법설과 무아지경속에 고달품을 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후의 걸작을 남겼을 것이리라.
 
우리나라는 백제때부터 석탑이 발달하여 신라에 이르러 더욱 많이 축조되어 탑탑응행 (탑이 기러기처럼 줄서있다) 이라고 까지 말 했으며 고려를거쳐 이조초까지 1300기의 탑이 쌓여져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 라고 불러 졌으나 이조 중엽에 이르러 억불숭유정책에 의하여 조탑이 자연 이루어 지지 안했다.
 
서양에서도 사원 탑 건조가 중단되어 오다가 철재로 파리에 에펠탑이 세워질 때 마이산 일각에 백여기의 탑군이 신비롭고도 화려 하게 축조된 의의를 찾을수 있다.
 
동서양을 통하여 근세에 조탑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을때 마이산 탑과 같은 년대에 건조된 파리의 에펠탑을 들을수 있다.
 
이 두 탑을 대조해보면 매우 흥미롭다,프랑스 대혁명의 백년제를 기념 하기 위하여 1889년에 8백만푸랑의 거액을 드려 300 상공에 철재탑을 완성시켜 예술의도시 파리를 상징하고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석탑의 문화재로서의의 논문중에서......)
 

 

 

무심코 지나치려 했던 탑사의 명물입니다.

암마이봉의 암벽에 붙어 타고 오르는 능소화입니다.

 

 

 

절벽에 능소화가 피었습니다.

 

 

암마이봉을 타고 오르는 능소화 나무를 먼곳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생명의 신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커다란 돌들이 반죽되어 역암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동안 암마이봉의 기세에 눌려 있던 숫마이봉이 수줍은? 자태를 드러냈습니다.

마치 요즘 제 자화상을 보는 듯

숫마이봉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며 하산하였습니다.

 

.....